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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밥 말리:원 러브 줄거리/정보 , 밥말리 일대기

by funfun 한 마미 2024.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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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말리:원러브 영화 포스터

 

2024년 개봉한 미국의 전기 뮤지컬 드라마 영화이다. 레이날도 마르쿠스 그린  감독이 연출하였으며, 배우 킹슬리 벤 아딜이 밥 말리 역을 맡았다. 싱어송라이터 밤말리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이영화의 정보/줄거리, 그리고 밥말리의 일대기를 알아보자.

 

밥 말리:원 러브 영화 정보

개봉 : 2024.03.13

장르 : 드라마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국가 : 미국

러닝타임 : 107분

배급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작사 : 플랜 비 엔터테인먼트, 터프 공 픽처스, 스테이트 스트리트 픽처스

감독 : 레이날도 마르쿠스 그린

출연진 : 킹슬리 벤-아딜 , 라샤나 린치, 제임스 노턴 외

소개 : 전설의 아티스트 밥말리, 스크린을 뜨거운 전율의 무대로 만들다! 오랜 분열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빠진 자메이카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스마일 자메이카 콘서트를 준비하던 밥 말리는 총격을 입고 영국으로 망명을 택한다. 런던에서 지내며 사랑과 평화, 공존의 메시지를 담은 엑소더스 앨범을 발매하고 전 세계가 열광하는 아이콘이 된 밥 말리. 그는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자메이카 국민들 앞에서 평화를 노래하는 콘서트를 열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데... 슈퍼스타, 시대의 아이콘, 메시지가 된 밥 말리. 멈추지 않고 전 세계에 평화와 사랑을 노래하다.

밥 말리:원 러브 줄거리

1976년,자메이카에는 무력 충돌이 일어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밥 말리는 전쟁 중인 파벌사이의 평화를 위해 스마일 자메이카라는 공연을 하기 위해 발표하고 콘서트를 준비한다. 준비하는 동안 밥 말리와 아내 리타 그리고 밴드 멤버들은 어느 날 괴한의 총에 맞는다. 다행히 생명엔 지장이 없고 밥 말리와 리타는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붕대 투혼을 발휘하면서 8만 명이 운집한 콘서트를 강행한다. 공연을 한 후 밥 말리는 자국민들이 자신과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것에 슬퍼하며 콘서트에 온 군중들에게 총알 자국을 보여준다. 밥 말리는 아내 리타에게 자신과 밴드 멤버들이 런던으로 투어 가는 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델라웨어로 가서 어머니와 함께 있으라고 한다. 그렇게 새로운 앨범 콘셉트를 구상하기 위해 구군분투하던 그는 리타에게 영국에서 자신과 다시 합류하길 바란다. 영화 엑소더스의 사운드트랙과 그들의 상황에서 영감을 얻어 동명의 앨범을 녹음하기 시작한다. 이 앨범은 히트를 치고 레게 음악, 라스타파리 운동이 대중화되는데 도움을 준다. 음반 회사에서는 유럽 투어를 계획하지만 밥 말리는 아프리카 전역에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아프리타전역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이 문제 때문에 리타와 다투고 재정적 문제 때문에 매니저 돈 타일러와도 다툰다.  그런 밥말리는 어느 날 발톱 아래 까만 점이 생기고 리타와 음반 제작자인 크리스 블랙웰은  걱정하는데.. 결국 밥 말리는 희귀 피부암 진단을 받는다.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밥 말리는 리타, 타일러와 화해를 하고 마침내 1978년 자메이카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공항에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집으로 돌아온 밥말리에게 당시 자기와 멤버들을 쏜 저격수가 찾아와 용서를 구하고 밥 말리도 용서를 한다. 밥 말리는 마침내 평화 콘서트를 할 준비가 되었다 생각하고 '원 러브'라는 노래로 자메이카 사람들을 위한 공연을 준비한다.  

밥 말리의 일대기

영국군 장교였던 백인아버지 노벌 싱클레어 말리와 19세의 흑인 어머니 세델라 맬컴 부커 사이에서 자메이카 트렌치타운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가 된 밥 말리는 어머니를 따라 킹스텅 빈민가로 이사를 한다. 빈곤과 각종 범죄로 가득 찬 동네에서 제대로 된 학업을 이어가기 힘든 밥 말리는 15세가 되던 해 학교를 그만두고 용접공으로 취직한다. 밥말리는 버니 웨일러, 피터 토시와 함께 16세에 가수로서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드리프터즈, 임프레션즈, 샘 쿡, 컨트리 가수 짐 리브스와 당시 자메이카의 토속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2년에 그는 Wailinf Rudeboys로 알려진 Teenagers와 함께 첫 번째 음반인 Judge Not을 발표했다. 이후 팀명으로 웨일러스를 채택하고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평범하지 않은 곡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어 자메이카에 서서히 퍼지고 있던 SKA 비트 음악을 시도했고 그래서 rude boy music으로 불리기도 했다. 1966년에 밥 말리는 리타 앤더슨과 결혼하여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자메이카로 돌아온다. 이때에 자메이카에서 급속히 성장한 래스터패리교가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SKA , Rude Boy music과 더욱 발전한 형태인 rock steady로 그의 곡들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다. 그러나 1973년 이전까지는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가 메이저 음반사였던  Island Record에서 그의 첫 음반을 만들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결과 전 세계인들에게 처음으로 레게를 소개하게 되었다. 1974년 웨일러스 멤버와 결별하고 아내 리타가 포함된 여성 보컬 트리오를 조직한 후, 발표되자마자 레게의 클래식이 돼버린 No Womam, No Cry와 Lively Up Yourself 가 수록된 아주 뛰어난 명반, Natty Dread를 발표했다. 1974년 당시 밥 말리 곡 중이 하나인 I Shot the Sheriff는 에릭 클랩튼 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는데 그 곡은 팝 싱글 1위를 차치하기도 했다. 저항 정신과 평등 인권 등을 가사에 담아 노래를 부르던 밥 말리는 수 차례 위협을 받기도 했는데, 자신의 조국인 자메이카가 정치 세력의 대립으로 폭동이 일어나 비상사태가 선포된 1976년,  조국으로 돌아와 반대를 무릅쓰고 스마일 자메이카 공연을 준비한다. 공연 이틀 전에 괴한의 난입으로 자신은 물론 가족과 매니저가 총상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붕대를 맨 체 공연을 강행하였고 영국으로 피신한다. 그는 평소에 축구를 좋아하는데 경기 중에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그의 몸에 있던 암세포를 발견했다. 암치료를 거부한 그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78년 뉴욕매디슨 스퀘어가든을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을 투어 했다. 뉴욕에서의 공연을 기념하기 위하여 실황을 담은 Babylon by Bus를 발매했고, 뉴욕 공연은 레게 역사상 가장 파워풀한 라이브 공연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해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평화를 위한 콘서트와 보스턴에서 흑인 자유투사를 위한 자선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무리한 투어 일정은 그의 건강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었다. 말리는 음악 활동 후반에 노래를 통해 정치적인 메시지를 표하기도 했다. 1980년 다시 투어에 나선 그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조깅하다가 쓰러졌고 암은 그의 뇌와 폐  그리고 심장에 까지 퍼져 있었고 8달 후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7달 전인 1980년 11월 4일 라스타파리 운동을 버리고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대주교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았다.